쓰마지마 요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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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마지마 요시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였다. 니혼 대학 제2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닛폰 통운 우라와를 거쳐 1962년 다이마이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1970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1964년에는 평균 자책점 2.15를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통산 250경기 출장, 29승 32패, 평균 자책점 2.80의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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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마지마 요시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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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선수명 | 쓰마지마 요시로 |
영어 표기 | Yoshiro Tsumashima |
원어명 | 妻島芳郎 |
출생지 | 도쿄도 나카노구 |
생년월일 | 1938년 10월 9일 |
신장 | 178 |
체중 | 72 |
투구 | 우 |
타석 | 우 |
수비 위치 | 투수 |
프로 입단 정보 | |
프로 입단 연도 | 1962년 |
첫 출장 | 1962년 |
마지막 경기 | 1970년 |
경력 | |
아마추어 | 일본 대학 제2 중학교·고등학교 일본 통운 우라와 |
프로 | 매일 다이에이 오리온스 도쿄 오리온스 롯데 오리온스 (1962 - 1970) |
2. 생애
니혼 대학 제2고등학교 시절인 1955년 추계 간토 대회 도쿄도 예선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나미키 데루오가 에이스로 있던 니혼 대학 제3고등학교에게 막혀 팀은 탈락했다. 이듬해 1956년 하계 고시엔 대회 도쿄도 예선에서 4차전 상대인 세이케이 고등학교에게 패하면서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닛폰 통운 우라와에 입사, 1958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는데 1차전에서 에이스 호리모토 리쓰오를 구원하여 등판해 우승 후보인 닛폰 생명을 꺾었다. 1961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는 2차전(첫 경기)에 선발로 기용됐지만 덴덴 규슈에게 패했다.[2] 이때 팀 동료에는 시부타니 세이지가 있었다.
1962년 다이마이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이듬해인 1963년에 첫 승을 기록했다. 1964년 56경기에 등판하여 승수는 불과 6승, 탈삼진 93개로 적었지만 평균자책점은 2.15를 기록하며 리그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듬해 1965년에도 팀내 최다인 57경기에 등판, 선발진의 일각으로서 첫 두 자릿수인 10승을 기록했다. 1967년부터는 주로 중간 계투로 활약했지만 1969년 이후에는 등판 기회가 줄어들면서 1970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2. 1. 아마추어 시절
니치다이 제2고 2학년 때인 1955년 추계 관동대회 도쿄 예선 결승에 진출했지만, 니치다이 제3고의 에이스 나미키 테루오에게 막혀 패했다.[1] 3학년 때인 1956년 여름 고시엔 도쿄 예선 4회전에서 세이케이 고등학교에 패해 고시엔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1] 졸업 후 1957년 일본통운 우라와에 입사하여 후루야 노리(古谷法夫) 코치의 지도를 받았다.[1] 1958년 도시 대항에 출전하여 1회전에서 에이스 호리모토 리쓰오를 상대로 좋은 릴리프를 보여주며 우승 후보였던 일본생명을 꺾었다.[1] 1960년부터는 이나바 세이지(稲葉誠治) 감독의 지도도 받았으며, 1961년 도시 대항에서는 2회전(초전)에 선발로 기용되었지만, 덴덴 규슈에 패했다.[1] 이때 팀 동료로는 시부야 세이지가 있었다.[1]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니치다이 제2고에서는 2학년 때인 1955년, 추계 관동대회 도쿄 예선 결승에 진출했지만, 니치다이 제3고의 에이스 나미키 테루오에게 막혀 패했다. 3학년 때인 1956년에는 여름 고시엔 도쿄 예선 4회전에서 세이케이 고등학교에 패해 고시엔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졸업 후에는 1957년 일본통운 우라와에 입사하여, 후루야 노리(古谷法夫) 코치의 지도를 받았다. 1958년 도시 대항에 출전하여, 1회전에서 에이스 호리모토 리쓰오를 상대로 좋은 릴리프를 보여주며, 우승 후보였던 일본생명을 꺾었다. 1960년부터는 이나바 세이지(稲葉誠治) 감독의 지도도 받았으며, 1961년 도시 대항에서는 2회전(초전)에 선발로 기용되었지만, 덴덴 규슈에 패했다.[1] 이때 팀 동료로는 시부야 세이지가 있었다.1962년에 다이마이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2년차인 1963년에 첫 승을 기록했다. 3년차인 1964년에는 56경기에 등판하여, 승수는 6승, 탈삼진 93개로 적었지만, 방어율은 2.15로 퍼 리그의 최우수 방어율을 획득했다. 1965년에도 팀 최다인 57경기에 등판하여, 선발진의 한 축으로서 처음으로 두 자릿수인 10승을 기록했다. 1967년부터는 주로 중간 계투로 활약했지만, 1969년 이후 등판 기회가 줄어들었고, 1970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상세 정보
3. 1. 출신 학교
니혼 대학 제2고등학교 출신이다.3. 2. 선수 경력
닛폰 통운 우라와를 거쳐 1962년 다이마이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도쿄 오리온스, 롯데 오리온스에서 1970년까지 선수로 뛰었다.3. 3. 수상·타이틀 경력
쓰마지마 요시로는 1964년에 최우수 평균 자책점을 1회 수상하였다.3. 4. 등번호
쓰마지마 요시로는 1962년부터 1970년까지 등번호 11번을 사용했다.4. 통산 투수 기록
도쿄
롯데